본질적인 내용이 중요한거 아닌가? 왜 이렇게 사소한거에 집착해…
상사가 문서의 오탈자 등 작은 걸로 시비턴다는 느낌이 들때 이렇게 생각했었는데…요즘은 AI가 쓴 문서를 보면 스트레스를 받는 내가 과거의 그 상사가 된 기분이다
AI 얘기다. 요즘 검토할 문서를 받으면 AI 티가 나는 순간부터 유독 심한 피로감을 느낀다. 회사 안에서 받는 문서도, 밖에서 오는 문서도 마찬가지다. 실무 리더인 친구들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문서 작성에 AI를 쓰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나도 알고 있다. 나도, 너도, 그리고 우리 모두가 AI를 쓰고 있다는 걸. 그저 ‘앞으로 봐도 뒤로봐도 AI로 쓴 글로 보이냐 아니면 ‘AI를 조미료처럼 뿌린 것 같나’ 정도 차이 일 뿐이라고 보는데… 그럼에도 AI를 활용한 문서를 받으면 피로감을 먼저 느끼는 이유는 뭘까?
당연히 나 또한 회신 초안을 잡거나 자료를 조사할 때 AI를 많이 쓰는데… 받는 문서의 문장은 매끈하고 내용은 충실한데…
AI가 작성했는지보다 내용이 중요한데 왜..?
처음에는 이 피로도의 원인이 ‘AI 특유의 문체를 보는 순간 노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인가 싶었다. 특히 나는 AI로 작성한 내용 대부분을 고치는 편이라 작성자가 AI로 쓴 글을 덜 손봤다는 것에 민감한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AI로 문서를 작성한게 문제인가?
형식 때문에 내용을 못보는것 아닌가? 내용이 중요하잖아…
AI 시대에 이런 형식에 집착하면 바로 꼰대 직행이닷!정신차리자!
그래서 여러 번 다짐했다.
형식에 집착하지 말고 이 내용의 본질을 보자
‘이 사람이 하고 싶어하는 말’에 집중하자
‘기입된 사실’에 집중하자
그러다가 드디어 알았다. AI로 작성한 글 읽기의 스트레스의 근원이 거기 있다는 걸.
AI를 이용한 문서 대부분이 내용은 풍부한데 집중하자고 했던 내용의 본질 ‘작성자가 어디까지 이해했고, 어디까지 확인했는지’, ‘이 사람이 하고 싶어하는 말’이 그래서 뭔지가 불분명했다.
하지만 이렇게 AI 문서에 학을 떼게 되고…
조금 더 설명을 하기 위해 최근에 주고받은 문서들을 예로 들어보면…
상황 1 - 채팅 링크를 받았다
사안에 대한 의견을 전달해달라고 했더니 AI채팅 링크를 줬다.
'정리해서 주세요'라고 하니 이걸 보시는게 제 생각의 과정과 왜 이렇게 했는지를 더 알기 쉬우실거예요.
고유명사인 제품명이 20개 쯤 언급되었는데 오탈자 검수 안한 걸 받았다. 이건 양반이지...
예를 들면 골화증인데 모두 공화증으로 써있다거나…, 단 한 번만 읽어봤어도 바로 발견했을 오탈자인데…
상황 2 - AI 아바타 대전 속 검증 휴먼
A가 문서 검토를 도와달라고 했다. B가 보낸 문서였다.
아티팩트로된 B의 문서를 열심히 읽고 검토해서 보냈는데, B의 회신에 대한 A의 아티팩트 두번째 초안을 확인하며 의아해졌다. A,B의 두 문서 모두 정리는 잘 되어 있지만 서로의 질문의 답변으로서는 내용이 묘하게 빗나가 있었다. 심지어 기초 전제(1)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후 내용을 작성할 수 없는문서였는데 이 사항에 대한 확인 질문이 나중에 매 턴마다 반복되었다.
이어지는 A와 B가 주고받는 아티팩트를 확인을 반복하다 보니 ‘각각이 어디까지 이해했고, 어디까지 확인했는지’를 알 수 없었고, 나중에는 AI 둘이 대화하는 것 같은데, 이 사이에 사람인 내가 껴서 뭐하고 있는건지 현타가 왔다.
물론 중간에서 검토를 맡은 내 몫도 있다. 처음에 전제(1)부터 맞추고 시작했으면 이 왕복이 반으로 줄었을 것이다.
상황 3 - 이거 AI 아바타 싸움이야 뭐야?
C가 만든 보고 문서를 읽었는데, 무엇을 승인해달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설득용 문서에는 설득을 하기 위한 형식이나 빌드업들이 있는데, 해당 문서에는 사실 관계만 여럿 적혀있었고 근거나 요청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래서 꼼꼼히 피드백을 작성하고 구두로도 설명했는데 불과 15분 만에 전체가 완전히 바뀐 새 문서를 받았다. 피드백 문장을 프롬프트에 그대로 넣어 재생성한 결과물임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반영이 안된 것은 아닌데 의도한 바는 아니었고, 어떤 의도로 왜 고쳤는지 알 수 없었다.
피드백은 작성자의 생각의 여지를 열어주기 위한 것이지 이런 기계적 수정을 바란 것이 아닌데…
셋 다 내가 겪은 일이지만 나만 겪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실무 리더인 친구들과 이야기해보면 비슷한 장면이 계속 나온다.
사실 상황 3처럼 요청이 흩어진 문서는 AI 이전에도 흔했다. 요청과 결론을 맨 앞에 두는 법은 예전에 비즈니스 이메일 본문 작성법에서 정리한 적이 있다. 달라진 건, 이제는 그 문서가 15분 만에 통째로 다시 온다는 점이다.
보이나요? AI가 작성한 문서의 모호함과 구멍들
일을 잘하려면,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잘 하려면 작성자가 어디까지 확인했고 어디부터 모르는지를 알아야 한다. 글을 읽고 검토할때도, 말을 할때도 마찬가지다. (솔직히 나는 회사에서의 대화에도 가장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부분도 ‘우리 같은 이야기 하고 있는거 맞지?’까지 인 것 같다….)
직접 쓴 글은 작성자의 이해도 파악이 쉬웠다. 모르는 부분은 분량이 적거나 설명이 모호했고, 쓰다보니 ‘이 부분은 잘 모르겠다. 확인이 필요하다’고 확인 요청이 왔었다. 모르는 내용을 쓸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AI의 등장 후, 내가 받는 문서들은 이 문법을 파괴해서 너무 혼란스럽다.
Why 1. 구체적이고 매끄럽지만, 의도가 모호하다
AI가 너무 내용을 잘 알려주다보니 이해를 못해도 그럴듯하게 구체적으로 쓸 수 있다. 문제는 구체성이 곧 이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내용이 풍부하지만 주제가 모호해지는 경우가 많다. 알겠는데 그래서 뭐 어쩌라는 것이지? 하게 되는 것이다.
Why 2. 이해도와 신뢰 범위를 가늠할 수 없다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바로 본론으로 논의의 수준을 확 올리게 되는데…. 대화하다 보면, 문서를 뜯어보다보면 알게 된다.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해야겠구만… 이해했다고 적힌 데서 질문이 나오고, 보낸 질문에 답이 오기 때문이다.
**즉, AI로 글을 작성하는거 자체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이해와 판단의 과정이 부실해지는게 문제라고 본다 **
AI가 작성한 문서를 읽는 것은 사람입니다
나는 AI문서에서는 상대의 이해 상태와 정보의 신뢰 범위를 짐작하기 어려워 계속 확인하고 추정을 해야한다는 점이 이 피로도의 원인이라고 결론 내렸다. 논의를 개시했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부지기수고, AI가 정리한 내용을 다시 재구성해 정리하다보면 힘이 쪽 빠진다.
이런 경험이 누적되다보니 AI로 쓴 문서라는 생각이 들면, ‘다들 AI로 적당히 쓴 것 같은 문서 사이에서 나는 사람으로서 얼마나 시간을 투입해야 하나’ 고민이 된다. 심지어 당근마켓에서 AI가 써준 다정하지만 영혼 없는 판매글을 마주할 때조차 비슷한 피로를 느낀다.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GeekNews에 올라온 나는 AI가 쓴 글을 자동으로 무시하기 시작했다의 글쓴이 또한 업무 문서에서 AI 생성 흔적을 느끼는 순간 내용을 쓰루하거나 문서에 이미 적힌 내용을 발신자에게 다시 묻게 된다고 한다.
문서는 서로의 시간을 아껴주기 위한 것…
협업의 기저에는 ‘우리 힘을 합쳐 서로의 시간을 아끼고 더 큰일을 해내자’가 있다고 생각한다. 혼자서 못하는 일을, 혼자하는 것보다 더 잘하려고 같이 일하는 건데 서로가 병목이 된다면 협업을 안하니만 못할 것이다.
그러려면 자신이 다루는 내용을 어느 정도는 소화한 상태에서 커뮤니케이션해야 한다.
무엇으로 문서를 쓰건 내가 소화하지 않고 넘긴 문서는 내 일을 남에게 미루는 것과 다르지 않다. 모르는 부분을 AI에 정리시켜 아는 사람에게 확인받으면 보내는 쪽은 편하지만,검토자가 사실 여부를 일일이 검증하고 작성자의 의도를 역추적하는 노력을 하게 하는 것 또한 책임을 전가하는 일이다. 나의 작성 시간은 10분으로 줄었지만, 검토하는 사람의 시간은 1시간으로 늘어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자.
특히 내가 하는 일은 컨설턴트로 고객을 설득하고 프로젝트를 실행으로 이끄는 일인데, 내가 소화하지 않은 문서로는 설득을 할 수가 없다. 아는 내용도 딜리버리를 잘하기 위해 플로우를 설계하고 바꾸고 조정하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하는데, 본인이 소화하지 못한 문서로는 어떤 실행도 담보할 수 없다.
AI 문서를 ‘믿고 거르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하여
팀장으로서 AI문서를 잘 읽기 위한 나의 자세
일단 AI를 쓰는 것이나 글귀에 AI티가 나는 것은 통제할 수도 없다. 이 상황에서 피로도에 굴하지 않고 나의 역할인 ‘팩트 체크와 교정자를 넘어 방향성을 주는 사람’을 더 힘차게 해내기 위한 원칙을 작성해보았다.
1. AI로 쓴 글도 그 사람의 최선일 수 있다고 믿자
판별해봐야 소용이 없기도 하고, 판별이 잘 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AI 티나는 문장이 내용 확인 안함 + 성의 없음과 같은 말은 아니기 때문에 이 부분에 집착하지 않으려고 한다. 글쓰기가 너무 어려운 동료가 AI가 있어 좋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사람이 어떻게든 쓴 문서는 그 사람의 최선일 수 있다고 믿자.
2. 요청을 받을 때는 의도를 핀포인트해 물어본다
막연하게 “전체적으로 봐주세요”라는 요청은 받지 않고 확인하고 싶은 부분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물어본다. 문서 전체를 봐달라는 요청과 이 부분이 맞는지 봐달라는 요청은 다른 일이다.
- 무엇을 요청하고 싶은 것인지
- 그를 위해 무엇을 검토했으며
- 확인된 사항과 아닌 사항를 명시하라고 한다.
3. 맥락 없는 ‘초고속 재수정본’은 즉시 반려한다
수정본을 받을 때는 “이전 피드백 중 어떤 맥락을 반영했고, 무엇을 왜 바꿨는지 핵심 변경 사항 3가지”를 기입해달라고 요청한다. 본인의 의도나 근거를 적어야 하면 내용을 한번 더 보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라도 묻는게 효과가 있다.
팀장으로서 AI문서를 잘 쓰기 위한 나의 자세
동일하다. 쓰고나니 AI시대가 아닐때도 그렇게 해왔기도 하고… AI 덕분에 누구나 그럴듯한 문서를 1분 만에 뽑아낼 수 있지만, 문서의 가치는 ‘작성자가 문장 뒤에서 고민하고 검증한 깊이’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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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 확인: 상대가 원하는 게 뭔지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를 쓰기 전과 쓰고 난 뒤에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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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증 범위 명시: 무엇을 확인했고 무엇을 모르는지/확인하지 못했는지는 명확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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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관점 포함: 나의 관점을 명확히 한다. 내 관점을 말할 수도 있고, 말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 이 정도만 명확히 해보기로!
물론 이렇게 기준을 세워두고도 AI 티가 팍팍 나는 문서를 마주하면 여전히 현타도 오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수정해서 보내게 되지만! 모두가 겪은 일. 잘 이겨내보리라!
AI 시대를 살기 쉽지 않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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