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적인 내용이 중요한 것 아닌가? 왜 이렇게 사소한 것에 집착해.”
상사가 내가 쓴 문서의 오탈자를 교정하거나 작은 것을 지적할 때 이렇게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요새는 AI가 쓴 문서에 학을 떼는 내가 바로 그런 상사가 된 느낌이다.
요즘 가장 큰 업무 고민은 AI가 쓴 업무 문서를 읽는 일이다. 정확히는 AI 티가 나는 문서를 읽기 싫다.
나도 모두가 AI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안다. 앞으로 봐도 뒤로 봐도 AI로 쓴 글인지, 살짝 조미료처럼 썼는지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나 또한 회신 초안을 잡거나 자료를 조사할 때 AI를 많이 쓴다. 심지어 AI가 있는 세상에 살아서 너무 좋다. AI로 쓴 문서가 성의 없다고 생각하거나 사용 자체를 꺼리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최근 몇 주 동안 문서를 읽다가 “아, 읽기 싫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문장은 매끈하고 내용은 구체적인데 AI 특유의 문장이 보였다. 사람이 정리한 문장인지 AI가 정리한 문장인지 대강 느껴지고, AI 작성 문서라고 생각하는 순간 읽기도 전에 피곤해졌다.
문체 문제가 아니었던 피로
처음에는 내가 AI로 쓴 문서를 AI 티가 난다는 이유만으로 평가절하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AI가 쓴 내용 대부분을 고치는 편이라서 덜 손봤다는 사실에 민감한 게 아닐까 싶었다.
“어허, 나 이제 꼰대가 다 되었구만.”
형식에 집착하지 말고 이 사람이 하고 싶은 말과 문서에 적힌 사실에 집중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스트레스받지 말자고도 했다. 그러다 알았다.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 바로 그 본질, 이 사람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와 어디까지 확인하고 썼는지가 보이지 않는 것이 스트레스의 근원이었다.
AI를 쓴 뒤 작성자가 해야 할 이해와 판단까지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방식이 힘들었던 것이다.
완벽한 포맷 사이에서 사라진 답
최근에 A가 문서 검토를 도와달라고 했다. B에 대해 A가 피드백하는 문서였다.
열심히 읽고 검토해서 보냈는데 B의 회신에 대한 A의 두 번째 초안을 확인하면서 점점 의아해졌다. A와 B의 문서는 모두 잘 정리되어 있었지만 서로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는 묘하게 빗나가 있었다. 어떤 내용을 모르고서는 문서를 작성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그 내용에 관한 질문이 나중에 나오기도 했다.
A와 B 사이에 끼어 문서를 반복해서 확인하다 보니 각각 어디까지 이해했고 어디까지 확인했는지 알 수 없었다. 완벽한 포맷의 문서가 오갈수록 애매한 지점을 내가 계속 정리해야 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다른 날에는 C가 만든 임원 보고용 문서를 읽었다. 무엇을 승인해달라는 것인지 알 수 없어서 결국 처음부터 다시 썼다. 설득용 문서에는 설득을 위한 흐름이 필요한데 사실관계만 여럿 적혀 있었고, 근거와 요청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수정을 요청하자 “모두 잘 반영했습니다”라는 답이 왔다. 반영은 기계적으로 되어 있었고 어디를 어떻게 고쳤는지 확인하기 어려워서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세부 피드백을 적어 구두로도 전달했는데 15분 뒤에는 전체를 바꾼 새 문서가 왔다. 작성자가 어떤 판단을 더했는지는 여전히 확인하기 어려웠다.
문서에서 사라진 작성자의 상태
문서를 읽고 검토하려면 작성자가 어디까지 확인했고 어디부터 모르는지를 알아야 한다. 직접 쓴 글에는 그런 부분이 어느 정도 보였다. 모르는 것을 구체적으로 쓰기는 어렵기 때문에 분량이나 구체성에서 티가 났고, 아예 잘 모르겠다고 밝히며 도움을 요청하는 일도 있었다.
요즘 받는 문서는 분량도 많고 구체적이지만 의도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AI가 내용을 너무 잘 정리해주니 오히려 그 구체성에 주제가 묻히기도 한다. 문장은 매끈한데 확인한 것과 확인하지 않은 것을 가르기 어렵다. 이해했다고 적힌 부분에서 질문이 나오고, 그 질문에 다시 잘 정리된 답이 오면 그제야 상대의 이해 상태를 알게 된다.
결국 작성자의 이해 상태와 정보의 신뢰 범위를 가늠할 수 없으니 피로하다. 일일이 다 물어볼 시간도 없어 문서 전체를 읽고 다시 상황을 파악한다. AI로 쓴 문서라는 생각이 들면, AI로 적당히 만든 것 같은 문서들 사이에서 나는 사람으로서 얼마나 시간을 써야 하나 싶어진다. 심지어 당근에서 AI가 써준 듯한 다정하지만 영혼 없는 판매 글을 볼 때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GeekNews에 소개된 나는 AI가 쓴 글을 자동으로 무시하기 시작했다의 글쓴이도 업무 문서에서 AI 생성 흔적을 느끼는 순간 문서에 이미 적힌 내용을 발신자에게 다시 묻게 된다고 했다.
이해하고 검증하는 일의 주인
우리는 업무를 하면서 서로를 도와 일한다. 자기가 다루는 내용을 이해해야 나와 다른 사람의 시간을 아낄 수 있다. 도움을 요청할 때 무엇이 필요한지 명확히 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르는 부분을 AI에 정리시켜 아는 사람에게 확인받으면 보내는 사람은 편하다. 대신 이해하고 검증하는 일은 받는 사람 몫으로 넘어간다. 작성자가 어디까지 확인했는지 알아내는 데도 시간과 비용이 든다.
특히 내가 하는 일은 컨설턴트로서 고객을 설득하는 일이다. 내가 소화하지 않은 문서로는 설득할 수 없다. 아는 내용도 잘 전달하려고 흐름을 설계하고 바꾸는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한다. 모르는 내용으로는 그 과정 자체가 시작되지 않는다.
예전에 회의록을 쓸 때도 사실관계만 나열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쉬웠다. 하지만 결국 상대가 무엇을 확인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보여야 했다. 그때 정리한 회의록을 빨리 쓰고 다시 쓰지 않는 방법과 지금 AI 문서를 검토하는 일은 꽤 닮아 있다.
AI 문서를 읽을 때 묻는 세 가지
그래서 이제는 AI로 썼는지 굳이 판별하려고 하지 않는다. 판별해봐야 소용이 없고 잘 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AI 티가 나는 문장이 곧 내용 미확인이나 성의 없음은 아니다. 글쓰기가 너무 어려운 동료가 AI가 있어서 좋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사람이 어떻게든 완성한 문서는 그 사람의 최선일 수 있다고 믿으려고 한다.
대신 검토 요청을 받을 때 세 가지를 확인한다.
1. 어디를 봐야 하는지
확인하고 싶은 부분이 정확히 무엇인지 묻는다. 문서 전체를 봐달라는 요청과 특정 내용이 맞는지 봐달라는 요청은 다른 일이다. 막연하게 전체를 검토하는 일은 되도록 받지 않으려 한다.
2. 무엇으로 고쳤는지
수정본을 받을 때는 어디를 고쳤고 무엇으로 바꿨는지 요약해달라고 한다. 완성된 새 문서만 받으면 이전 피드백이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찾는 일부터 다시 해야 한다.
3. 근거가 무엇인지
수정한 이유와 근거도 함께 묻는다. 의도나 근거를 적으려면 내용을 한 번 더 보게 되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라도 묻는 것이 효과가 있는 듯하다.
AI로 문서를 쓰는 내 자세도 다르지 않다. 상대가 원하는 것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쓰기 전과 쓴 뒤에 확인한다. 무엇을 확인했고 무엇을 모르거나 확인하지 못했는지 밝힌다. 내 관점도 명확히 한다. 말할 수도 있고 말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가 판단한 범위는 내가 알아야 한다.
다만 모든 문서에 긴 검증 기록을 붙일 필요는 없다. 단순한 초안이나 내부 아이디어 정리라면 오히려 일이 늘어난다. 누군가의 판단과 승인, 수정이 이어지는 문서에서만 이 세 가지가 특히 필요했다.
이렇게 정해놓고도 AI 티가 나는 문서를 열면 여전히 먼저 힘이 빠진다. 위의 두 건도 결국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검토해서 보냈다. 역시 AI 시대를 살기 쉽지 않다.
자주 묻는 질문
AI로 쓴 문서는 신뢰하면 안 되나?
AI 사용 자체가 문서의 신뢰도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내가 힘들었던 것은 AI를 썼다는 사실이 아니라 작성자의 의도, 확인 범위, 판단 근거가 보이지 않는 문서였다.
AI 티를 없애야 좋은 업무 문서가 되나?
문체만 사람처럼 고친다고 해결되지는 않았다. 무엇을 말하려는지, 어디까지 확인했는지, 어떤 판단을 더했는지가 먼저 보여야 했다.
AI 문서 검토를 요청할 때 무엇을 함께 보내야 하나?
어디를 봐야 하는지, 무엇을 어떻게 고쳤는지, 그 근거가 무엇인지 함께 보내면 검토자가 문서 전체를 처음부터 다시 읽는 일을 줄일 수 있다.